인생은 원래 예의를 차릴 줄 모르는 법입니다. 그래서 네가 그 지랄인가


"뭐 씨발아, 진지할 때는 진지한거고 좆.같을 때는 좆.같은 거고 염세적일 때는 염세적인 거고 내 안에 수많은 면들이 공존하는 데 뭐 자꾸 네한테조금 더 자주 비춰진 모습으로 판단하고 쿠사리 주는 거임.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에 대한 그 판단을 가지고 날 멀리하는 거지, 나한테 "그건 아니지 않냐;"같은 씹소리 좀 하는 건 안 되는 일이야. 염세적으로 나온다고, 짓껄인다고 그게 진짜 좆.대로 내뱉는 건 아닌데?"























* 그래, 이것들이 '성 차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 갖고 그러냐"는 태도로 나오는 이유는 이것들이 '남자들의 유대'의 핵심이고, '여자들의 유대'의 핵심이니까 그런 거 잘 안다. (단편적인 예로 남자들은 "여자들은 왜 먼저 안 다가옴? 난 먼저 고백하는 여자가 좋더라" " 크~ ㄹㅇ 신여성" 같은 말들을 내뱉으며 지들만의 유대감 형성하고 여자들은 서로에게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로서 유대감 형성하고, 수동적인 여자들을 주체적인 자신과는 다른 게 한심하다 까내리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경우)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말초를 자극하는 '재미'에 기인하고 있는 의식을 지닌 단어들이니까 놓아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는 시점에서 친숙한 문화를 탈각시키는 건 불안과 두려움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데 그 '유대'가 다른 '성'을 타자화할 때보다 여럿이 두루 어우러질 때 더 만족스러운 유대감이 나오는 걸 알아야 한다.
물론 그게 지금 현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는 후세대가 새로운 진리에 친숙해짐으로서 관철되는 것이니, 우리는 멈출 수 없다.
더이상 후세대에게 여성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예쁘고', '어린' 면모로 평가되어지는 문화를, 남자는 여자를 지켜줘야 하는 존재로서 '지킬 의무'가 있는 존재, '남자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낙인 찍히는 것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문화로 인한 '정'을 강요하는 문화도 더이상 알려주고 싶지 않다.
여자로서, 남자로서가 아닌 나로서. 우리 모두가 주체적일 수 있기를. 
너는 나고 나는 너가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로서 주체성을 지닌 인간끼리의 배려와 예의를 갖추는 수평적인 관계를 위해, 그런 정이 많은 사회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 인간 관계에 있어서, 위계는 매우 중요하다.
꼰대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너와 나 사이의 영역을 존중하는 위계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들의 "무거우니까 내가 들어줄 게"는 전혀 고맙지 않는 찝찝한 오지랖이다.
정말 그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긴 하다.
신체적으로 평균적인 힘이 여성이 남성보다 약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여성'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런데 마치 해야될 것만 같아서, 또 하고 나면 가치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져서 '도와준다'.
하지만 이 도움은 전혀 이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이다.
여성에게는 주체성, 능동성을 빼앗고 수동성을 심어주고, 남성에게는 의무 아닌'의무'를 심어주는 시혜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권한마저 침범해버린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가치있는 게 아니다, 고차원적인 생물이라 불리우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을 하고 정립할 수 있기에 가치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로소 사람인 것이고 '생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은 이 위계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인간 사회의 문화에서의 배려란 물론 큰 특권이다. 
받을 수 있기에, 함으로서 성취감 이를테면 자기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쉬운 타자 공헌이기에 필수불가결한 것인데, 
받는 사람은 원치 않아하고, 주는 사람은 줘야만 할 때 결코 '배려'라 할 수 없다.
받는 사람이 원한다한들, 사회가 개입해 '주고 받는 사람=위계 정립'을 하는 순간 배려일 수 없다.
약자이기에 배려받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기에 서로 배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배려에서는 '권력의 형태가 드러난다'
아니 그 권력에서 비롯된 '위계 재정립'에 불가하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불편해해야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다"를 버리고 '왜 내가 이런 걸 해줘야 하지"? '왜 내가 이런 걸 받아야 하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삭막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세상이 뜨겁기만한 사막이었을 뿐인 것이다.

머 결국은 어제 좋고 등 이벤트 마련



* 자세히 보아야 더럽다.
그렇기 때문에 'Reference'가 중요한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분쟁하는 것을 한국인들은 싫어한다.
한국 교육 과정 중에 이성적, 논리적 글쓰기 말하기가 개차반 취급받는 것도 한몫 할 테다.
한국에서 말 잘 하고, 글 잘 쓰는 건 '문학적인' 접근일 때 더 와닿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한국인이 문한적인 인간이라 그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사 해결 방법을 논할 때 이성적이어야 한다, 이상적이어야 한다.
생각을 추론하는 과정이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얼마전 '240번 버스' 같은 사건이 줄지 않겠나.

무슨 하얀색 같은걸로 땜빵 하긴 취소로 되어있네요 제스쳐가 없는건



나는 너일 수 없고, 너는 나일 수 없다.
너와 나는, '너'와 '나'일 수 있고, 우리일 수 있다.
하나처럼 보이는 우리일 순 있다.
우리 오늘부터 친한 친구 하자고 해서 친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의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다.
그게 '정'의 최선이다. 그게 이상이다.